기독교인임이부끄럽다

마지막으로 [b]

미국의이라크침공

아, 기독교인임이 부끄럽다.

[충격과 공포]의 유령이 세계를 전율시키고 있습니다. 일년에 국방비를 4000억 달러(500조 가까운 돈)쓰는 세계에서 제일 강하고 유족한 나라가 기껏해야 10억 달러(1조 2천 만원)의 국방비를 쓰는 가난에 찌든 나라에 대해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충격과 공포]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고 분노케 하는 것은 이 같은 야만적 공격이 가장 신성한 종교의 이름으로 펼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을 두 국가간의 전쟁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두 문명간의 충돌로 볼 수도 없습니다. 기독교 문명권에 속한 많은 나라들이 이 전쟁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부시행정부의 전쟁을 지지하는 영국, 스페인과 동구의 여러 나라에서도 정치지도자들만 전쟁을 지원할 뿐, 그 곳 국민들의 다수는 전쟁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 안에서도 반전 여론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번 전쟁을 촉발시킨 9.11사건이 터졌던 뉴욕에서조차 양식있는 시민들은 9.11과 같은 충격과 공포가 이라크 땅에서 되풀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지난 22일 뉴욕에서 벌어진 반전여론은 정권교체가 이라크에서가 아니라 미국에서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을 우리는 여러 시각에서 조명할 수 있습니다. 초유일 강국이 된 미국이 21세기에서 펼쳐 보이고자 하는 제국주의 정책(미국의 세기 구현이라는)의 관점에서 또는 이스라엘 지원을 통한 국내 유대인 지지(이들은 주로 민주당임)확보의 관점에서, 또는 이라크 석유 자원에 대한 영향력 독점과 그에 따른 중동 및 중앙아시아 에너지 물류권 장악의 차원에서 조명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내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곤혹스럽게 생각하고 심지어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딱한 실존적 고뇌를 고백하는 차원에서 이 전쟁의 한 단면을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전쟁이 일종의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전쟁이든 그것이 종교화가 되면, 그 주장은 가장 독선적이 되며 그 과정은 가장 극렬해지면서, 그 결과는 가장 처참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가장 위선적인 비극이 되고 맙니다. 성전(聖戰)또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의 이름아래 온갖 추악한 탐욕이 춤을 추게 되고, 악마들의 광란이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종교전쟁은 전쟁당사자들이 근본주의 신념(또는 원리주의 신념)으로 무장되어 있을 때 발생하기 쉽습니다. 근본주의 신앙으로 무장된 집단들 사이의 싸움은 역사상 가장 추악한 싸움으로 기억됩니다. 이번 전쟁도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격자도 피해자도 모두 거룩한 전쟁을 치룬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강자가 근본주의로 무장하고 펼치는 전쟁이야말로 더욱 위선적이기에 더욱 처참한 전쟁이 되고 만다는 진리를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이번 전쟁은 부시 대통령을 위시한 미국제일주의 신봉자들이 기독교근본주의의 확신을 바탕 삼아 계획하고 실행하고 있는 전쟁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성전(聖戰)이며 또한 신판 크루세이드(Crusade)전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근본주의의 기본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 세계를 선과 악으로 간단하게 구분해서 판단합니다. 하기야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혜는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역사현실에서는 선과 악을 칼로 두부 자르듯 갈라놓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심사숙고와 관용과 인내의 덕목이 필요합니다만, 근본주의자들은 매사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보고 대번에 해석하고 신속히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근본주의의 첫째 특징이지요.

둘째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세계를 선과 악으로 갈라놓고 나서 자기는 항상 선이고 상대방은 항상 악이라고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근본주의 신앙이 돈독할수록 자기는 절대로 선의 편이고 상대방은 절대로 악의 축을 이룬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교만의 극치요, 종교적 독선입니다. 가장 위험한 발상이지요. 참다운 뜻에서 보면, 이 독선이야말로 가장 反종교적 심성이라 하겠습니다. 예수와 부다를 슬프게 하고 핍박했던 추악한 힘이였지요.

셋째는 두 번째 특징의 필연적 결과로써, 악의 축인 상대방을 박살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그것도 초전에 박살을 내야 합니다. 그간 개발된 모든 도구를(이념적이든, 군사적이든 간에) 총동원해서 전쟁초기에 짐짓 악마화시켜 놓은 적을 완전 궤멸시키려는 의지입니다. 왜냐하면 악마와의 싸움은 거룩한 싸움이기에 이겨 마땅하며, 마땅히 초전에서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선과 악 두 축 사이에 위치해있는 모든 사람들과 집단을 불순하거나 비겁한 존재로 낙인찍습니다. 자기 축과 전통적으로 가까웠던 집단들이 자기편에 들지 않을 때 가차없이 그들을 적인 양 정죄하는 짓도 서슴치 않습니다. <내편을 들지 않으면 모두 나의 적>이라는 신념으로 전통적 우호권을 끊임없이 분열시켜 나갑니다. 지금 서구권은 역사상 최초로 이 같은 근본주의 작태로 인해 심각한 균열의 조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특징을 지닌 근본주의 신념은 그것이 갖는 확신의 문화(Culture of Certitude)와 힘숭상의 문화로 인해 일단 악으로 규정된 상대방을 총공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 근거가 그 같은 공격으로 합리화되고 유지되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이 같은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이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되면, 그 나라의 앞날은 위태로워지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의 지도자가 근본주의자일 경우 세계 전체가 위태로워지며 인류역사가 잠시나마 파행의 길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시대통령은 과연 기독교 근본주의자인가요?

원래 그는 아버지를 따라 감독교회(Episcopalian)교인으로 자랐습니다. 이 교파는 근본주의 성향과는 별로 관계없는 수준 높은 기독교 교파입니다. 결혼한 뒤 그는 아내가 속했던 감리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는 망나니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40세에 그가 부흥사 빌리그레함 목사를 만나 종교적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술을 끊고 난봉꾼(reveler)의 삶을 청산하고 신의 계시(revelation)를 존중하는 근본주의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 후보였을 때 아버지를 도와 기독교 우파 세력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텔레반젤리스트(Televangelist: TV로 부흥 사경회를 여는 목사들)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지요.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 수구세력인데, 정치적 영향력 증대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아들 부시의 근본주의 신앙은 정치적 야망과 야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93년 텍사스주지사 출마하기 직전에 "예수 믿는 자만 천당에 간다"는 신념을 공개적으로 밝혔는데, 비록 유대인이나 카톨릭신자, 그리고 무종교인들로 부터는 신뢰를 받지 못했지만, 이른바 바이블벨트(Bible Belt: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속하는 텍사스에서는 오히려 정치적 인기를 크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주지사로 당선되었고, 99년에 그는 보수적 교계 지도자들을 지사 관저에 초청하여 안수기도를 받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더 높은 자리(곧 대통령 자리)로 부름을 받았음을 알렸다고 합니다. 일종의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셈이지요.

그는 어렵게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한국적 정치수준으로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elected)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부시가 임명한 대법원 판사들의 도움으로 선택된(selected) 것입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도, 그는 그의 당선을 신의 섭리로 믿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 마시기 앞서,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하면서 설교집을 읽습니다. 최근에는 침례교 목사인 Chamber씨가 저술한 설교집 『My Utmost for the His Highest』를 읽고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 영감으로 그는 세계의 대통령 의식을 갖게된 것 같습니다. 미국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은 나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인류 모두에게 자유라는 소중한 선물을 안겨주어야 할 소명을 미국은 신으로부터 받고 있으며, 미국 대통령으로 아니 세계의 대통령으로 그는 그 소명을 감당할 수밖에 없음을 확신하게 된 듯 합니다. 역사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에게 이 같은 막중한 사명을 맡긴 것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이라크 지도층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 악을 박멸하여 이라크인들에게 자유의 선물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그가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Newsweek지 마저 부시를 구세주(메시아)의 사명을 지닌‘약자를 못살게 구는 강단의 목사(the paster in the bully pulpit)’라고 묘사했습니다.

희한하게도 부시대통령 주변에서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근본주의 신자라는 뜻에서 그의 종교적 코드(code)와 잘 맞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미국제일주의자들이며 또한 미국의 세기(America Century)의 도래를 확신하는 기독교신자들입니다. 정기적으로 백악관에서 기도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안보보좌관 라이스(Rice)는 장로교신자이지만 부시의 메시아적 열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Newsweek 작년 12월 16일호 참조). 그녀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지만, 이 복잡한 세상에서 만사를 흑백으로, 그리고 선악으로 보는 일에 부시를 효과적으로 잘 도와주고 있습니다. 부통령과 국방장관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이 같은 기독교근본주의 입장에서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그들은 앞으로 광활하게 펼쳐지는 미국지배의 단일 세계 모습을 그리며 이미 얼마간 그 세계지배의 모습에 취해 있는 듯 합니다. 팍스 로마나 시대를 거쳐,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의 팍스 브리타니카를 지나, 마침내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되었음을 오래전 부터 자축하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소련이 망한 뒤, 미국 유일 지배체를 더욱 열망하면서 이 꿈의 실현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가차없이 단호하게 제거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세계지배구축이라는 야망의 거미줄에, 이른바 오늘의 악의 축에 속하는 나라들이 만만하게 걸려든 셈이지요. 먼저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은 전통적 미국남부의 군사우위문화와 개신교근본주의문화의 추동으로 더욱 강화되어 왔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9.11이후 이른바 부시 닥트린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같은 정책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예방전쟁정책 또는 선제공격정책입니다. 이것은 강자의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상황판단에 따른 일방적 침략 정책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정책 밑바탕에는 미국 남부의 개신교 근본주의 열정이 뜨겁게 흐르고 있음을 또한 주목해야 합니다. 이 닥트린에 따라 지금 이라크와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라크가 바로 개신교근본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신앙적으로 혐오해 온 성서의 바빌론의 후예라는 사실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바빌론은 거대한 사탄(악마)으로 은유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바빌론왕국의 침공을 받아 기원전 6세기 수도 예루살렘은 처참하게 궤멸되었으며, 왕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군대에 의해 눈알이 빠지게 될 뿐 아니라 신하들과 함께 처참하게 묶여 바빌론으로 잡혀갔습니다. 그 기나긴 고행의 포로생활을 겪었습니다. 스스로 21세기의 <새 이스라엘>로 군림하여 세계역사를 주름잡고 싶었던 부시의 사람들에게 지금 이라크는 옛날 그‘악령’바빌론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특히 사담 후세인을 왕초 사탄 후세인으로 착각하는 것이겠지요.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이번 전쟁이 근본주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와 소망에 따라 치뤄야 할‘거룩한 전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 거룩한 사명 때문에 양식있는 세계인의 다수가 그토록 반대했음에도 부시와 그 일당은 꿈쩍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증거해 주신 가치가 과연 오늘 저 개신교근본주의자들(미국이나 한국, 그 어디서든지)의 신앙과 같은 것일까요? 만일 같은 것이라면, 저는 평생 개신교신자로 살아온 것을 부끄럽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독교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단연코 예수의 삶이 보여준 메시지는 그러한 것이 아님을 외치고 싶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당시 유대적 근본주의자들 (또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피소되어 로마의 극형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이 바로 열광적 유대적 근본주의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하나님은 상대방을 적으로 몰아 악마화하는 증오의 신이 아니였습니다. 예수의 하나님은‘아빠’하나님이였습니다. 당시 아람어로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다정하게 부를 때 아빠(abba)라고 불렀습니다. 마치 우리 자녀들이 아버지를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듯 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인자한 아빠처럼 다가 왔지요. 그의 유명한 탕자비유에 나오는 아빠처럼 말입니다. 그 아빠는 정말 엄마같은 아빠지요. 자기 유산의 몫을 챙겨 도시로 나간 탕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 사랑의 어버이, 바로 그 아빠가 예수의 하나님이었고, 바로 예수 자신이였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와 <저들>간의 적대적 거리가 없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받아 잘못 낭비한 탕자와 아빠간에도 사랑의 소통이 너무나 아름답게 원활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곧 닥쳐올 환난과 전쟁을 예감하시면서 예루살렘 사람들, 특히 당시 유대 근본주의자들을 향해 눈물로 호소를 했습니다(마태 23:37-38).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가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예수는 폭격하는 독수리가 아니라, 폭격 당하는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품어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암탉이였습니다. 암탉같은 하나님이였습니다. 오늘 바그다드 하늘을 <충격과 공포>의 온갖 무기로 붉게 물들이며, 병아리같은 이라크의 어린이와 여성까지 무자비하게 폭격하는 현대판 독수리나라의 하나님이 결단코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의 삶과 죽음에서 나타난 가장 소중한 가르침에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는 원수를 악마화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는 천상(天上)에 사탄의 권력이 존재한다는 당시의 지배적 상식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유대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그러한 악마는 비유컨데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치듯, 떨어져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루가 10:18). 그는 원수를 악마로 정죄하기는 커녕, 원수를 오히려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원수라하더라도 악마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원수를 무조건 악마로 정죄하는 그 마음이 악마적이라 하겠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나도 선할 수 있고 악할 수 있듯이, 나의 적도 선할 수 있고 악할 수 있습니다. 내 속의 악과 적의 악이 서로 도와 그 악마적 힘을 증폭시키게 되면 충돌이 불가피하지요. 그 증폭은 상대방의 악마화에서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의 원수사랑의 명령은 결코 악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수 속에 있는 선을 키워주면서 내 속에 있는 선도 함께 키워야 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와 내 속에 있는 악을 모두 무력화시켜 마침내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서로 자라게 하는 힘, 바로 그것을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설령 백보 양보하며 상대방을 악이라고 합시다. 이 경우에는 성서는 악을 이겨내야 하되 반드시 선으로 이기라고 했습니다(로마 12:21). 악하다고 규정된 적을 악한 방법으로 이길 수 없음을 말합니다.‘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임을 예수께서는 예수의 적을 향해 칼로 대항했던 당신의 제자에게 직접 현장에서 깨우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예수를 따른다는 크리스천들이 온갖 세속적 무기를 다 동원해서 그들의 적들을 섬멸하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요. 그들 스스로가 진정한 예수따르미가 아님을 증명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칼쓰기, 총쓰기, 온갖 무기쓰기는 예수의 삶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간 미국이 개발해온 모든 신무기들을 이라크 땅에서 실험해보려는 부시의 호전성은 너무나 反예수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는 부시의 전쟁실험으로 억울하게 죽어 가는 모든 사람들을 그의 날개로 품고 보호하려는 오늘의 암탉이라 하겠습니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부당한 제도 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시고 그 치욕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피땀 흘리시며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자기를 폭력으로 죽이는 세력을 껴안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의 길은 세속적인 뜻에서 승리의 길, 승리주의의 길이 결코 아니였습니다. 승리주의의 길은 폭력으로 가득찬 길임을 아셨기 때문이지요. 그는 스스로 처참한 패배의 골고다길로 가셨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부활경험은 감동적인 체험입니다.

여기서 저는 거듭난 신자(Born-again Christian)에 대해 꼭 하고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시처럼 그 거듭난 체험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면서, 아니 그렇게 소중히 여기기에 거침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기독교 신자가 우리주변에 너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새로 태어난 경험을 갖는 것은 너무나 값진 종교적 체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닮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분이 그렇게 사셨듯이 자기를 온전히 비워 남을 가득 채워주는 감동의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비움과 남을 채워줌은 단 한번 일어나는 일회적 사건으로 결코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그 과정은 뼈아픈 자기 반성과 자기 부정을 요구합니다. 거듭날수록, 자기는 죽고 남들은 살아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가 결코 쉽지 않기에 그것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고투(孤斗)해야하는 아픔의 연속입니다. 거듭난 일회적 경험을 자랑하는 신자가 그것에 메여,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무시한다면 그 거듭남의 체험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체험으로 인해 더욱 겸손해져서 자기는 낮아지고 남을 높혀야만 그것이 그토록 소중하고 감동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감동적 창조의 지속적 흐름입니다. 계속되는 자기 부정의 따듯한 흐름입니다. 그 흐름으로 하나님을 순간순간 체험하게 됩니다. 그 흐름으로 자기는 죽고 남들은 살아나면서 마침내 사람들 사이에 평화의 큰 강물 줄기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 낮은 곳으로 줄기차게 흘러 내려가는 예수의 겸손한 인품, 그 평화의 인품을 우리는 끊임없는 거듭남의 체험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됩니다.

딱하게도, 너무도 딱하게도, 저는 부시, 체니, 럼스펠드, 라이스 등의 미국 개신교신자들 속에서 이 같은 평화의 따뜻한 흐름을 도무지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살벌한 전의(戰意)와 섬뜩한 살육의 의지를 확인하는 듯하여 괴롭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부시처럼 거듭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거듭날까 두렵습니다. 아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일찍 예수를 유혹했던 사탄이 있었습니다. 악마가 있었습니다. 청년예수가 메시아의 삶을 삭막한 중동 황야에서 구상하려고 했을 때, 악마는 예수에게 메시아의 사명으로 세 가지를 달콤하게 제시했습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역사적으로 큰 일을 해내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공통된 유혹이기도합니다. 정말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첫째 유혹은 가장 흔한 유혹이지요. 이 세상의 돌처럼 흔해 빠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흔한 돌을 희소가치를 지닌 떡으로 변화시키고 싶은 욕망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처지에서 지도자가 되고 싶으면, 구세주가 되고 싶으면, 저 많은 돌을 떡으로 변화시킬 카리스마를 갖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만사 해결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개발 독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경제 성장 제일주의를 빙자한 가짜 메시아가 나타나 자기는 넘치게 채우면서도 백성은 철저하게 비워 버리지요. 백성을 수탈하는 악마가 되고 말지요.

둘째는 권력의 유혹입니다. 세상 모두를 향해 호령하면 모두가 그 호령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역사적으로 로마의 네로 황제에서부터 히틀러와 스탈린을 거쳐 최근 군부독재에 이르기까지, 남을 복종시킬 수 있는 이 마력의 유혹에 빠져버리고 싶지요.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허망하리 만큼 인류는 처절하게 불행해집니다. 그래도 권력의 유혹은 대단해서 이른바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도 세계지배욕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다만 그 탐욕이 더 위선적으로 되면서 더 기교적으로 숨겨질 뿐이지요. 셋째, 경제적 부와 정치적 권력을 독식해도 인간은 만유인력의 법칙 아래 있는 한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게 마련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초인간적인 능력을 지녀 스스로 신적 존재임을 과시하고 싶은 종교적 탐욕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천사를 보내어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살아남는 기적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입니다. 종교적 권위 곧 신적 권위를 갖고 싶은 종교적 권위주의의 탐욕이지요. 이것은 종교적 교주가 되어 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싶은 유혹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악마는 오늘도 야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번 미국과 이라크간의 전쟁을 보면서 이 세 가지 악마의 꾀임이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는 듯 합니다. 이라크 해방의 이름아래, 이라크의 유전을 전일적으로 관장하고 싶은 경제적 탐욕이 꿈틀거립니다. 바로 이점을 꿰뚫어 본 뉴욕시민들은 지난주 22일 " 우리는 텍사코(석유회사)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 " 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이번 전쟁을 통해 부시팀은 21세기의 유일한 제국주의로 거듭나고 싶은 강한 지배충동에 사로잡힌 듯 합니다. 만일 후세인 정부를 궤멸시킨 뒤 바그다드에 친 부시 정권이 들어선다면, 그것은 21세기 미국제국주의의 깃발을 더 높이 들어올리는 신호가 될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부시와 그 참모들은 그들의 신의 이름으로 아니 그들의 신의 축복으로 이 크루세이드에서 필승한다는 신념에 더욱 불타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이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해주기에 오직 승리만이 있을 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국내 모 일간지 특파원 보도에 의하면, 쿠웨이트 사막에 주둔한 미 제5군단 사령부에 있는 미군들이 북상준비중 이런 찬송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 나는 예수님 따르기로 결심했네. 돌아오는 길은 없나니..."

그들 병사들도 그들의 최고 사령관의 신앙을 본받아 다만 승리의 길로 예수님 따라 전쟁하러 간다고 찬송가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정말 예수께서 이 찬송가를 들으신다면 어떤 표정을 짓겠습니까? 입만 열면 “ God bless America ”를 불러대는 오늘의 미국인을 보면, 정말 암탉같은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제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이르지 말기를!

정말 으시시합니다. 과연 그들의 승리 행진에 사랑과 평화의 예수님이 동행하실까요? 정말 이 전쟁에서 예수님은 어디 계실까요? 거대 군함에서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하는 미국 해군들 속에 계실까요?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도하고 있는 부시와 그 참모들 속에 있을까요? 바그다드 하늘 위에서 온갖 고성능 폭탄을 폭죽 터트리듯 마구 뿌리는 파일럿들 속에 계실까요? 나는 확신합니다. 폭격 맞고 죽어 가는 자식을 품에 안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이라크의 엄마들과 아빠들 속에 예수님은 계시고, 거기서 그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상처받고 있는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로 품으며 울고 계십니다. 사랑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See Also
위의 [부시, 대통령인가 성직자인가]새 창으로 열기기사를 보고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올릴려고 했습니다만 한완상 총장의 글이 제가 쓰려고 했던것과 내용이 비슷해서 그냥 글을 퍼왔습니다. 이땅의 위정자를 위해 기도를 합시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니까요.-- Nyxity 2003-3-27 17:16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말 문제다... 폭격을 가하는 미국 그리스도인들 예수를 믿으니 천국에 갈 것이고.. 바그다드의 불쌍한 어머니와 아이들은 예수를 안믿으니 지옥에 갈 것인데...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 Pdmshift 2003-3-28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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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3-3-28 9:51 p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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