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연기

마지막으로 [b]

소녀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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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트가 톤이 일정하다 싶었더니 디지털스캔 인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도 디지털의 가능성일까?

전반적으로 재밌었다. 동일인물이더라도 보는 각도와 표정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벽면 한 가득 소녀들의 얼굴들로 가득찬 것도 묘한 느낌이다.

그나저나. 교복들이 정말 촌스럽다. -- Nyxity 2004-4-18 22:37


(의도적으로) 어색하게, 불쾌하게 찍힌 사진이라는 느낌을 전체적으로 많이 받았습니다. -- PuzzletChung
<오형근 작품의 이해>

미묘한 계조 속에 배어나오는 의미의 스펙트럼
오형근

‘아줌마 작가’. 지난 1999년 <아줌마> 전시 이후 아직도 그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다. 우리 사는 세상이 워낙 복잡한 곳이어서일까. 우리는 숙고 없이도 몇 마디 단어로 상대를 옭아매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의 사진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마주 앉아 작업을 이야기하며 우리 주변에서는 드물게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붙이고 있는 그의 섬세함을 대하고 있노라면 한 작가로서 섣불리 규정 당하는 일이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고역스러웠을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작업의 미묘한 중간계조들 가운데서 풍부하게 배어나오는 의미들을 음미하다보면 이 작가가 그토록 명쾌하게 재단되었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일평생 대표작 하나 대중들에게 각인시키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던가.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만치 작품이 인상적이었고 시대의 코드를 잘 담고 있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한동안의 공백을 깨고 오랜만에 개인전을 갖는 오형근을 만났다.

“전설적인 위대한 작가들은 모두 어린 시절 누군가로부터 카메라를 물려 받았더군요. 전 14살 때 아버지로부터 반자동 8mm 무비 카메라를 선물 받았습니다(웃음). 진작부터 영화광이었으니. 고등학생이 충무로로 영화필름 사러 다니고… 좀 엉뚱했지요.”

사진 작업을 시작으로 단편영화로 넘어간 사진가들이라면 로버트 프랭크를 비롯하여 여럿이 떠오르지만, 그는 반대로 영화로부터 사진으로 넘어간 경우랄까. 숫기 없는 학생이었지만 무슨 용기였는지 아버지, 할아버지 뻘되는 어른들이 회원으로 있는 8mm 영화동호회에 들어가서 요즘으로 치자면 뮤직 비디오 같은 작품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배우가 등장하는 멋진 장면을 꿈꾸면서도 내성적인 그로서는 늘 머릿속에서만 맴돌았지만, 후에 숱한 영화 포스터를 작업하게 된 씨앗은 이미 이때 뿌려졌던 셈이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그를 유학으로 떠밀었다. 막상 미국에 도착하고 보니 입학하려던 학교는 외국인 정원제한으로 한참을 대기해야하는 상황이었고, 대신 그는 영화를 공부할 수 있다는 브룩스에 입학한다.

“사진으로 유명한 학교라는 건 전혀 몰랐었지요.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학교에서는 영화를 공부하려면 필수적으로 사진에 대한 과정을 마쳐야만 했어요. 그것도 4×5" 대형 카메라를 구해서 본격적으로. 사람들 사진을 확대해보면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미묘한 피부의 모공, 눈가의 주름, 눈썹… 그 묘한 느낌들. 이때 사진에 푹 빠져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사진 쪽으로 진로를 바꾸었지요. 그 섬세함이 살아있는 다큐 사진을 하고 싶었습니다.”

영화광 소년의 눈에 비친 미국은 거대한 영화 촬영장이었다. 영화와 TV 등 영상매체가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삶을 연기하고 있었고,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은 어느새 그들의 역할 모델이 되어 있었다. 연인과 헤어졌을 때, 화가 났을 때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본 것처럼 행동했고, 악기를 연주하면서는 TV 드라마 속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폴 뉴먼, 존 웨인이 곳곳에 있더군요. 영어도 잘 하지 못하는 낯선 동양사람이 카메라를 들고서 ‘Can I take a picture…’하고 다가선 거지요. 영화 속에서 막 빠져나온 것같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았습니다. 마치 사회 전체가 진짜 아닌 가짜로 가득 찬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한번 촬영을 나가면 4×5" 필름을 이삼십 장씩 소모해가며 작업에 몰두했다. 여러 해 동안 계속된 이 작업을 그는 <미국인 그들>이라 이름 붙였고, 오하이오 대학에서 사진과 영화로 석사를 마친 후 귀국하여 이를 정리한 <사진․영화>(최갤러리, 1993)라는 전시를 연다. 국내 사진계를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그에게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지금도 학생들에게 농담삼아 이야기 합니다. 1주일의 전시기간 중 고작 36명이 전시장을 찾았었다고. 당연히 화랑측에서 홍보해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게 착각이었던 거지요. 더구나 그나마 방문하셨던 몇 안되는 사진계 선생님들의 두어 마디 짜리 평가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프린트는 제법 하는군’, ‘다이안 아버스라고 아나?’ 그게 전부였어요. 흰 배경을 사용하면 아베던, 플래시를 사용하면 아버스, 낯선 사람들이 등장하면 프랭크의 아류라고 판단해버리는 평가를 납득할 수 없었지요.”

말 몇 마디에 가볍게 재단되는 신고식을 그는 그때 이미 호되게 치룬 셈이었다. 더우기 당시 국내 사진계를 휩쓸었던 소위 만드는 사진(alternative mixed media, making photo)의 열풍은 가뜩이나 주눅들었던 그를 더 구석으로 몰고 갔다. 다른 유학파들과 함께 <한국사진의 수평전>(시립미술관, 1993), <한국 현대 사진의 흐름>(예술의 전당, 1994) 등에 참석했지만 주변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목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늘 고향 같던 영화판을 다시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패션 등 상업사진 작업에 힘을 쏟아부었다. 그가 처음 사진을 공부했던 브룩스가 상업사진으로 유명한 곳 아니던가. 이런 와중에 여균동 감독과 영화 <세상 밖으로>에서 함께 일하게 된다. 그의 포스터 작업으로서는 첫 작품이었다. 영화일에서 그에게 잊을 수 없는 또 한 사람, 당시 영화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던 심재명씨(현재 명기획 대표)도 이때 만난다.

“코드가 잘 맞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 포스터는 촬영을 쉴 때 잠깐 찍는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저는 주연 배우들의 일정을 하루 비워 줄 것을 요구했지요,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처음에는 반발도 있었지만 영화 <접속>의 성공 이후에는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던 일이 잘 되도록 도와준 것을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비록 그의 순수 작업들은 잘 떠오르지 않을 지라도,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알게 모르게 그의 작업에 익숙하다. <꽃잎>, <공동경비구역 JSA>, <장화홍련>, <스캔들>, 그리고 최근의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그의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던 영화들이다. 리처드 아베던과 어빙 펜이 커머셜과 파인아트의 경계를 오가며 작업을 이어왔다면 오형근 역시 그런 맥락 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셈이다.

“배우가 영화에 얼마나 빠져있느냐가 중요해요. 그렇다면 그 배우 하나로 영화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가 되거든요. 전 지나치게 포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신 진지한 눈빛을 차분하게 담아내려 애쓰지요.” 영화에 깊은 뿌리 하나를 내리고 있는 사진가의 말답다.

1999년의 전시 <아줌마>(소공동 아트선재센터)는 그를 일약 주목받는 작가로 만들었지만, 그는 또다시 상처받아야 했다. <아줌마>가 <미국인 그들>, <배우 이야기> 등 그의 이전 작업들의 연장선 상에 있는 작업이었음에도 매체들은 당시 여성의 정체성 문제가 부각되던 사회적 분위기에 맞추어 그의 작품을 예술작업으로서 보다는 ‘아줌마’라는 소재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보도했던 것. 언론의 선정성은 무서웠다. 심지어 그는 ‘아줌마’를 다루는 사회문제전문가처럼 간주되어 이런저런 토론 프로그램 패널로의 초청 제의도 수없이 피해다녀야만 했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저렇게 되면 앞으로 작가로서 작업을 이어가기 힘든데’하며 혀를 찼다.

“한 3년 묻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작업은 계속 이어갔지요. 전 명백한 것들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동성연애자, 고아원 같은 주제가 명백한 소재들. 제 관심은 갈등군 속에 있는 모호함에 있지요. <미국인 그들>의 경우에는 현실과 영화의 사이에 걸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호함이 있었고, <배우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카나리아나 트위스트김씨의 경우에도 분명 과거에는 유명했던 스타들이었지만 지금은 그 입장이 미묘하다는 모호함이 있었지요. 이런 점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제가 오랫동안 이태원에서 살아왔다는 것도 영향이 있을 겁니다. 여러가지 이질적인 문화들이 혼재하는 곳이지요. <아줌마>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분명 가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인데 사회적으로는 거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계층이었던 거지요.”

오랫동안 손에 익은 구형 4×5" 스피드그래픽 카메라는 인물의 피부 질감 하나하나를 세세히 드러나도록 만들고 플래시는 그들을 배경에서 분리시킨다. 늘 접하는 존재가 낯설게 드러나면서 우리에게 묘한 초현실감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작가가 설명적으로 붙인 제목들 - 이를테면 ‘호랑이 무늬 옷을 걸친 아줌마’하는 식의 - 은 그들을 더 건조하게 메말린다. 우리 마음 속에 언제 ‘아줌마’의 자리가 있기나 했던가.

전시중인 <소녀연기>는 지난 몇 년간 조용히 진행해오던 작업들을 선보이는 것으로, 일본작가 아라키 노부요시를 제외한다면 일민미술관이 국내 사진가에게는 처음으로 문을 개방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소녀들이라. 소재를 선택하는 그의 감성에 무릎을 치게 된다. ‘소녀’야 말로 아이와 성인의 중간적 속성을 지닌 이들로, 우리 사회에서는 여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떠도는 혼백처럼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인간 군상들이니 말이다.

“미성년자를 찍자니 초상권 문제도 있고 해서 연기학원에 다니는 여고생들을 모델로 삼게 되었습니다. 120여 명 정도와 함께 작업했고,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그중 60여 명의 초상들입니다. 그런데 촬영을 진행하다보면 이들이 어느새 자신들이 TV나 영화에서 접해오던 ‘연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연기자를 지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만치 매체의 영향 속에 젖어 살고 있는 거지요.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극단적인 톤을 없애고 중성적인 회색계열의 색조로 작업을 이끌었어요. 야외촬영이었지만 중간계조가 풍부한 하늘이나 물가를 배경으로 삼았고, 필름으로 작업했지만 고해상도 스캔을 거쳐서 디지털로 프린트했습니다. 풍부한 계조 표현은 전통적인 인화지에 미치지 못했지만 전체적인 작업의 느낌을 통일시키는 데에는 유리했습니다. RC 페이퍼의 번질거리는 느낌도 잘 어울리지요.”

자칫 여고생의 유형학으로 흘러 평면적이 되기 쉬운 작업이지만, 노련한 작가답게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보여준다. 동일 인물을 거의 시간차 없이 유사한 자세로 촬영한 사진 두 장을 병치하고(혹 일란성 쌍동이가 아닌가 그 차이를 더 유심히 들여다 보게 된다), 서구의 제단화나 삼면 화장 거울처럼 세 장을 나란히 배치하거나, 어느 하나로 규정되기 힘든 ‘소녀’와 잘 어울리는 원과 타원으로 전통적인 사각 규격을 탈피하는 등 변화가 풍부하여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그에 더해 남성들의 눈길을 더 받게 될 그 유니폼, 교복이 눈에 들어온다.

“하복을 입은 학생들을 촬영했지요. 참 묘해요. 유니폼은. 그 사회에서 ‘이만큼만 다리를 드러내고, 이만큼만 섹시해라’하는 식의 규범이 그 속에 담겨있거든요. 보이지 않는 남성의 권력과 관음욕구가 옷을 통해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 늘 떠다니는, 그렇지만 쉽게 감지되지 않는 욕망들. 대형 프린트가 가득 걸린 전시장을 거닐면서, 과연 예술가란 긴 더듬이를 지닌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다. 아득히 깊은 갱도로 내려갈 때, 해로운 공기를 감지해내기 위해 함께 동행하는 카나리아처럼 그들은 우리보다 앞서 사회의 탁함에 상처받고 그것들을 예술작품으로 우리 앞에 토해놓을 것이었다. 위지와 아버스를 좋아하고, 언젠가는 아라키 같은 작업도 꿈꾼다는 그의 더듬이에 걸려들 다음 소재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글/최재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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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5-6-1 10:46 a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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