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꼴Monologue/2004-05-12

마지막으로 [b]

Mon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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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200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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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진가와의 만남

감상적이기 쉬운 만남이었다.
그는 암과 맞서고 있는 초로의 신사였고, 나는 한 잡지의 젊은 기자였다.
수십 년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사진가가 밉살스런 종양에 눌려 건장한 몸을 떠받쳐야할 다리 한쪽을 절고 있었다. 첫 술자리에서조차 그는 한 꾸러미의 사진을 내밀었고 "사진을 봤으면 평을 하라"며 까마득한 후배의 소감을 구했다.
반 년이나 지났을까, 병은 이제 그 몸의 절반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빛나는 옛 시절의 무용담은 없었다. 나는 방 한켠에 아무렇게나 놓인 미국기자협회 사진기자상(1992년 LA흑인폭동 취재)을 보고서야 그가 훌륭한 사진기자였음을 알아차렸고, 오래 전 추천을 받아 등단했던 문인이라는 사실 역시 지인에게서 귀동냥으로 얻어 들었다.
그는 늘 현재를 살았기에 병실 구석을 뒹굴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고, 만날 때마다 최근 촬영한 사진이라며 인화지를 내밀었다. 작품이 좋다는 말을 건내면 아직 사진 볼 줄 모른다며 면박 당했지만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며 그를 아끼는 후배들과 모처럼 기분좋게 떠난 남도여행에서 오랫동안 손에 익은 롤라이플렉스의 셔텨가 엉키자 굳이 차를 돌리게 했다. 노인네의 망발이라며 속으로 흉을 보았을 망정,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사진은 그의 수행이자 선(禪)이었다.
"사람이 아닌, 작품이 기억에 남아야 해. 내 말은 내 작품 뒤에 있어야 해."
삶을 죄어오는 죽음 앞에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다그쳐 마지막까지 셔터를 누른 사진들, 그가 '스트레스'라 이름붙였던 작품들 앞에서 나는 그 말이 이루어졌음을 알았다. 한 장의 사진에서 작가의 말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들 모두가 감당하여야만 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한계상황을 담아내고 있었기에 죽음 앞에 선 한 개인의 삶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작품이 정말 마음에 든다"는 내 말에 그는 언제나처럼 퉁명스레 반응했지만 평소와 다른 흡족한 마음이 내게도 전해져왔다. 사진의 은입자들은 마치 말라붙어가는 그 피와 정력의 흔적들 같았다.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육체가 종양에 점령당하기 전, 자신의 남은 몸과 정신을 인화지 위로 모두 이주시키려는 듯 했다. 그것이 내가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얼마 뒤, 그는 갑자기 의식을 잃었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국화꽃잎 곱게 흩뿌린 그의 관 위에서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의 손에 삽이 들렸고, 흙이 덧뿌려졌다. 무덤 위로 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우산 밑으로 모여들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느릿느릿 산 아래로 향했다. 아름다운 장례였다.

최재균(월간 포토넷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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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4-5-18 12:05 a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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