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마지막으로 [b]

출애굽이 언제 쯤 있었는지(주로 람세스2세 언저리), 힉소스의 이집트 침입, 추출과 히브리인의 이집트 이주, 노예생활 후 탈출을 연결하는 것 모두 '출애굽이 실제로 있었다면' 이라는 전제하에 나오는 추론에 불과하고, 고고학적, 문헌적인 증거는 없다. -- Nyxity 2018-9-29 10:50 pm

아시모프의바이블

이렇게 추론해가면 압제자 파라오는 꼼짝없이 람세스 2세가 될 수밖에 없다. 성서의 압제자 파라오가 실존인물일 때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이 같은 단서를 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서 외에는 이스라엘인의 이집트 거주와 그들의 노예생활 및 탈출과정을 언급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데 있다. 특히 출애굽에 얽힌 어느 한 사건도 현대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이집트의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다.

- p. 171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토착 세력으로 보고 있고 잘 해보야 소수의 집단이 이집트에서 탈출해와서 합류했을 거라는 정도.

[Sources and parallels of the Exodus]새 창으로 열기

The scholarly consensus is that there was no Exodus as described in the Bible. Modern archaeologists believe that the Israelites were indigenous to Canaan and were never in Egypt, and if there is any historical basis to the Exodus it can apply only to a small segment of the population of Israelites at large.
Most modern historians reject any identification of the Hyksos with the Israelites, largely because it is generally believed that the early Israelites evolved within the land and culture of Canaan, rather than emerging from Egypt.[52] There is a current scholarly consensus that if the Israelites did emerge from Egypt, it must have occurred sometime during the 13th century, because there is no archaeological evidence of any distinctive Israelite material culture before that time.

[헛소리 모음 - 출애굽]새 창으로 열기
이 시대에 가나안은 이집트 병사들이 주둔하고 요새까지 이곳 저곳에 널려 있던 이집트의 영토다. 기원전 15-10세기 사이에 이 가나안 지역을 이집트가 얼마나 강력히 틀어쥐고 있냐면, 투트모스가 하루 행군거리마다 요새를 만들고, 보급물자와 숙영지를 확보해 놔서 (물론 군대가 주둔해서 지키고), 후대에 가서 람세스가 히타이트와 전쟁하러 북진할 때 행군속도가 하루 25마일 속도 ... (이게 그 유명한 호러스의 길이고, 뒤에 예수시대에 가면 일부를 바다길 via Maris라 부르는 바로 그 길이다.)
출애굽하던 시절의 이스라엘 인구를 대략 200만 정도로 상정하는데 (장정만 60만), 람세스가 히타이트와 제국의 사활을 건 고대사의 대전쟁을 치루기 위해 친정군을 이끌고 갈 때의 병력이 3만이 안된다. 히타이트가 조금 더 데리고 왔다고 하지만 이들도 3만근처로 당시에 5-6만의 병력이 격돌한 전쟁이 고대사 최대의 전쟁가운데 하나로 불린다. 그렇다면, 출애굽 때에, 60만의 장정이 있던 히브리인들이라면, 그냥 이집트 점령하고 살면 된다.
게다가 요셉 자손들이라는데 요셉이 팔려갈 때 나오는 약대 (낙타)상인보면 유향, 몰약, 향료 파는데.. 일단 낙타를 길들여 운송수단으로 쓰기 시작한게 아무리 올려잡아도 기원전 11세기에 저 물품들이 실제로 교역품이 돼서 노매드 아랍인들이 팔면서 역사에 등장한게.. 8세기 전후라.. 아주 딱 각이 나오는게 성서 짜집기하기 시작한 요시아 왕 시절의 풍경 그대로죠...

[이스라엘 출애굽 이야기의 난제들]새 창으로 열기

△출애굽기 12:37~39에서 이집트를 떠난 히브리인들은 성인 남자만 해도 6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성서의 몇몇 구절에서 '수천(數千)'으로 번역된 낱말은 '씨족'을 뜻할 수도 있다. 이런 근거로 보면 민수기 1:46의 표현은 60만 명이 아니라 600가족 혹은 씨족을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 장자들의 수는 민수기 3:43에서는 2만 2273명으로 나온다. 숫자가 정확히 주어져 있으므로 수천을 가족이나 씨족으로 번역할 수는 없다.)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중다한 잡족들(출 12:37~38)을 더하면 300만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수면 10열 종대로 행진한다고 해도 그 길이가 240km가 넘게 이어질 것이고 어느 특정한 지점까지 모두 도착하려면 8~9일이 걸립니다. 또한 시내 광야는 천 명 이상의 사람이 생활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도 문제입니다.
동쪽 건너편에 있는 요르단도 비슷합니다. 이 지역에서 유랑했던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막으려했던 아모리족의 시혼 왕과 헤스본에서 전투를 벌입니다(민 21:21~25, 신 2:24~35, 삿 11:19~21). 고대 헤스본이 위치했던 암만 남쪽의 텔 헤브반을 몇 차례 발굴했는데, 후기 청동기시대의 도시는 물론이고 작은 마을의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또한 에돔인들과 암몬인들의 저항을 받았다고 기록하는 성서의 이야기(민 20~21장)와는 달리 요르단 고원은 후기 청동기시대에 인구가 매우 희박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왕국이 아니라 농경 인구조차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출애굽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민족들과 전쟁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허구인가]새 창으로 열기

요셉에게 호의를 보였던 파라오는 셈족 계통의 힉소스 족 출신 왕일 수 있으며 나중에 이집트 민족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자 이스라엘 사람들을 미워했다고(출 1:8~10) 하는 추정이 가능해집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출애굽 이야기는 글자 그대로의 역사가 아닌, 편집되고 가공된 역사의 부스러기를 담고 있는 드라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추정, 가능성이지, 관련된 증거는 없음.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힉소스와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음. 말 그대로 '출애굽 이야기는 글자 그대로의 역사가 아닌, 편집되고 가공된 역사의 부스러기를 담고 있는 드라마' -- Nyxity 2018-9-27 9:10 pm
그런데 역사적으로 기원전 15세기에는 강력한 권력을 지닌 파라오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1425)와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기원전 1425~1401)가 가나안에서 대규모의 전쟁을 벌이는 시기였습니다. 이집트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은 고대 근동과 지중해 동부를 잇는 군사-경제 요충지였기 때문에 투트모세 3세를 시작으로(1482년 므깃도 점령) 여러 수비대가 전략적으로 배치되었으며(가자, 욥바, 벧스안, 예노암) 향후 100년 가까이 이집트의 지배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아마르나 서신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집트의 영향력을 보여 주는데, 도시간의 분쟁과 농촌의 불안 속에서도 패권은 이집트가 쥐고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작은 도시들을 정복하고 그들로부터 충성과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이 이처럼 강력한 왕들의 통치기에 일어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시대착오적인 기록도 있습니다. 파라오가(출 2:23에 따르면 처음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파라오는 죽었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파라오는 그 후임자이다) 말이 끄는 수레들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적합니다(출 14:6~9, 15:1~4). 그러나 말과 수레는 기원전 15세기에는 무척 희귀했고 기원전 13세기에 가서야 상당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피-람세스에서 진행된 건축 공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람세스 2세의 한 관리가 아피루('Apiru)에게 양식을 나눠 주라고 현장 주임에게 지시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아피루'를 성서의 '히브리'와 연결시키기도 합니다(아피루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아피루 또는 하비루는 일반적으로 일종의 변절한 외국인들로서 학자들은 그들을 '뿌리 잃은 떠돌이들'이라고 불렀으며 때때로 그들은 용병들과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만약 아피루가 히브리인들과 직접 관련이 있다면 그들은 람세스 2세 시기의 수도를 건설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람세스 2세의 말기에 이집트의 세력은 축소되고 그의 후계자인 메르넵타가 벌인 가나안 공격을 빼고는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지배력은 눈에 띄게 약해졌습니다. 기원전 1200년 무렵 제19왕조는 무질서와 혼란 가운데 막을 내렸는데, 13세기의 정치 역학 관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억압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해방을 시도할 만한 가장 적합한 환경이 됩니다.

요단 동편 상황 역시 13세기 출애굽을 뒷받침합니다. 민수기 20:14~21과 21:21~35에서 모세는 에돔, 모압, 암몬 왕국들과 접촉합니다.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이 정착 왕국들은 아무리 일러도 기원전 13세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을 압제한(출 1:8) 파라오는 세티 1세(Seti Ⅰ), 출애굽 당시는(출 2:23) 람세스 2세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출애굽 이야기는 기원전 7세기 요시야 왕의 시대 상황을 반영합니다. 아시리아 제국이 무너지고 이집트가 다시 패권을 잡게 될 때, 남유다 왕국의 요시야 왕 또한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펴서 유일신 야웨를 경배하고 다윗 가문의 유일한 왕이 통치하는 강대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집트의 야심과 아시리아의 간섭에서 온전히 벗어나 북이스라엘 왕국의 영토까지 병합하려는 요시야 왕의 열정은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이스라엘 민족의 다양한 이미지와 기억이, 이제 파라오의 전차 부대와 맞선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출시킨 기폭제가 되어 자신들의 고난을 상기시켜 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 준 것입니다.
→ 출애굽기의 유래는 사실 이거. -- Nyxity 2018-9-27 9:15 pm
출애굽의 최종 형태는 바벨론 포로기 시대(기원전 587~539년)에 제사장 집단에 의해 편집되고 확정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기적적으로 해방된 이야기는 외국 땅에서 속박된 바벨론 포로 상황에서 읽혀집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기원전 13세기(출애굽 시기)의 조상들에게만 적용되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속박, 구원, 언약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된 모든 세대들(요시야 왕 시대, 바벨론 포로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영광의 현존에 대한 경험을 나타냅니다.

고고학자 윌리엄 데버의 말을 빌리면, 출애굽 이야기의 다양한 전승 층과 여러 겹의 껍질을 벗겨내면 '자유를 위한 은유(a metaphor of liberation)'라는 알맹이가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 과정은 어떠했을까]새 창으로 열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까]새 창으로 열기

정복 모델을 지지하는 이가엘 야딘과 아브라함 말라마트는 정복과 정착의 실제 사건들이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군사 정복설에 여전히 핵심이 남아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말라마트 역시 정복 모델의 역사적 기초가 부실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성서의 정복 전승은 후 세대의 복잡한 작업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어떤 것은 후대의 편집자와 교정자들의 개념들이 반영되어있는 것이 확실하다…. 성서의 역사편찬은 신학적으로 설명되었다. 이런 경향 속에서 이스라엘의 주님(Lord)의 역할은 두드러지고 인간적인 요소는 물속에 잠겨들었다."

출애굽 시기를 15세기로 보건 13세기로 보건, 여호수아 장군의 탁월한 정복 활동에 의한 ‘대규모’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없었다는 것이 고고학 발굴의 결과입니다.


[메르넵타 비문]새 창으로 열기
석비에는 리비아와 해양 민족들의 땅들로 진군한 파라오가 점령한 도시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석비에 기록된 가나안의 도시와 민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중해변, 해양 민족을 대표하는 도시인 아스겔론(수 13:3), (2) 지중해와 산지를 연결하는 지역(쉐펠라)을 대표하는 게셀(삿 1:29), (3) 갈릴리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인 야노아(수 16:6), (4) 유대 산지를 가리키는 이스라엘. 1896년에 이 석비를 발견한 영국 고고학자 페트리(Flinders Petrie)는 너무나 흥분했습니다. 성경 이외에 이집트의 문헌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나온 최초의 고대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또는 나라를 가리키는 유일한 이집트의 문헌이 바로 이 메르넵타의 석비입니다.
메르넵타가 남긴 석비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증명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석비 때문에 분명해 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메르넵타의 때에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그들의 공동체가 유대 산지에서 주도적인 세력 또는 국가(12지파의 연합체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 오히려 이스라엘이 가나안 토착세력이었다는 것을 뒷바침하는 거 아닌가? -- Nyxity 2018-12-25 9:2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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