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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volutionary Discovery in China by Ian Johnson | The New York Review of Books]새 창으로 열기

[A Revolutionary Discovery in China | The Bahamund Journal]새 창으로 열기 - 한국어 번역

"특히 서구에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곽점 죽간’을 통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전통적으로 알려진 연대가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A Revolutionary Discovery in China https://t.co/DIvCZ1eHQW

— Jin (@nyxity) April 19, 2016

@nyxity 다만 이 글도 좀 나간 측면이 있습니다. 과거사람들은 원전텍스트에 가필을 하거나 교정을 가하는 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측면에서 전체적인 틀은 위작이 아닌데 후대에 가필되거나 변형된 요소가 있죠. 예시된 곽점초간의 도덕경도

— 예비 대머리 담륜 (@sldn1206) April 19, 2016

@nyxity 왕필의 도덕경에서는 "絶仁棄義"라고 써서 도가사상이 유교적 도덕관과 갈리는 분기로 간주되는 부분이, 곽점본에서는 "絶僞棄慮"로 되어 있어 주장의 결 자체가 달라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즉 도덕경의 틀은 전국시대에 마련된 것은 맞으나

— 예비 대머리 담륜 (@sldn1206) April 19, 2016

@nyxity 전국시대본이 지금의 것과 "유사하다."라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글의 일부밖에 보지 못하여 성급한 판단을 하는 것이기를 차라리 빕니다만......

— 예비 대머리 담륜 (@sldn1206) April 19, 2016

고증학자들 최고의 성과로 꼽히는 것이 고문본 상서(尙書)가 위작임을 밝혀낸 부분인데. 이것은 고문본 상서라는게 실제로는 순자와 논어 등을 짜집기하여 동진대에 완성된 위작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으로 고증학 최고의 성과로 불리는 부분.

— 예비 대머리 담륜 (@sldn1206) April 19, 2016

특히 이것이 당시 학계에 주는 충격은 굉장했는데, 성리학은 바로 이런 고문본 상서의 인심-도심론을 하은주 삼대의 지혜로 간주하고 주장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 즉 사상적 타당성이 공격받은 것은 아니나 전거의 아우라가 사라지는 일이라 거의 멘붕이었는데.

— 예비 대머리 담륜 (@sldn1206) April 19, 2016

이런 시대적 배경 때문에 한때 중국 고전들이 모두 의심받는 '擬古'의 풍토를 거친 것은 필연적인 역사적 단계이기도 했고. 그런데 문제는 많은 고전들이 이런 위고문상서식의 완전 위작만이 아니라, 원전에 가필-변형된 것도 많다보니 지나치게 의심받은 것도

— 예비 대머리 담륜 (@sldn1206) April 19, 2016

상당하고, 이것이 고고학 발굴이 전개되면서 많은 텍스트들이 의외로 전체적인 틀은 비슷한게 상당했던지라 '信古'의 역풍을 맞기도 함(...) 사실 이것은 전근대사회의 텍스트 다루는 방식의 문제를 근대인들이 한쪽면만 보고 접근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고.

— 예비 대머리 담륜 (@sldn1206) April 19, 2016

See also
우리가 오늘날 보는 《상서》는 남조(南朝) 양대(梁代) 이후에 유행한 위서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것은 동진(東晋) 원제(元帝) 때 예장내사(豫章內史) 매색(梅賾)이 헌납한 것이다. 이것은 출현 후 학술계의 신임을 매우 빨리 얻어 채대보(蔡大寶), 소감(巢甝), 비감(費甝) 등과 같은 당시의 학자들이 모두 이것에 소(疏)를 달았다.

진조(陳朝)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經典釋文)》은 이것을 주음(注音)의 대상으로 하였고, 당대(唐代) 공영달(孔潁達)의 《오경정의(五經正義)》도 이것을 표준 주본(注本)으로 삼았다. 따라서 당대 초기에서 북송 말기까지 500여 년간 이것은 줄곧 의심의 여지없이 선진의 《상서》진본으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남송 때부터 이것의 내막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오역(吳棫)과 주희(朱熹)였다. 이후 수백 년간 몇 십 명의 학자들이 이에 대해 거짓을 분간하고 고증하고 질의하여 나날이 서적 중의 위작을 일일이 심도 있게 도려내었다.

비록 몇몇 정통 유가사상을 옹호하는 자들이 크고 작게 외치고 모기령(毛奇齡)의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冤詞)》에도 일찍이 억울함을 호소한 바 있지만, 이것은 위서로 학술계는 이를 명확한 증거로 확정된 안건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불거진 문제는 이 위서의 편찬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처음에 믿었던 사람은 책을 헌납한 매색이었고, 후에 매작(梅鷟)이 《상서고이서(尙書考異序)》에서 황보밀(皇甫謐)이라 여겼으며, 정안(丁晏)은 《상서여론(尙書餘論)》에서 왕숙(王肅)이라 여겼는데, 정정조(程廷祚)의 《만서정의(晩書訂疑)》에서는 오히려 매색이 책을 헌납한 설을 철저히 부정하고 설사 매색이 책을 헌납한 사실이 진짜 있었다 해도 헌납한 것은 결코 이 책이 아니며 이 책의 출현은 동진(東晋) 초기가 아니라 유송(劉宋) 원가(元嘉) 연간이라 여겼다.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줄곧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요컨대, 학술계는 비록 오늘날 보는 《상서》가 위서라는 일치된 의견을 얻었지만 그 중 어느 것이 선진의 원시 문헌인지 어느 것이 후인의 위작인지에 대한 견해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으며, 이 책을 위조한 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의견이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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