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ightOfGlory

마지막으로 [b]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


('영광의 무게'는 1941년 6월 8일 Lewis가 Oxford에 위치한 한 교회에서 행했던 설교문으로서, Lewis의 글들 중 가히 '백미'로 뽑히는 글입니다)

(본 번역문은 '그 말씀'(두란노) 1998년 4월 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스무 명의 선량한 현대인들에게 한번 당신은 무엇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 보라, 아마 그들 중 열 아홉은, '비이기심'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 똑같은 질문을 예전시대의 위대한 기독교인들에게 물어보았다면, 그들은 아마 모두 '사랑'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적극적인 용어를 소극적인 용어가 대체해버린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철학적 의미 이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비이기심'이라는 이 소극적 아이디어 속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가 뭔가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난 그저 내가 마땅히 해야될 일을 한다, 즉 중요한 것은, 내가 절제의 미덕을 지키느냐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나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그 속에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 미덕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다. 신약성서는 자기부인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자기부인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목적은 따로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자기를 부인한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중에 얼마나 좋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인지에 관해 말하면서 성서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갈망에다 대고 호소를 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인의 사고 속에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갈망하고 또 그것의 만족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데, 나는 그런 관념은 칸트와 스토아학파로부터 기어 들어온 것이지, 결코 기독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해두는 바이다.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대담하게 보상을 약속하고 있는지, 또 그 약속된 보상이란 것들이 얼마나 엄청난 것들인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라. 아마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갈망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축 처져 있는 피조물인지, 무한한 기쁨을 주겠노라는 제안을 듣고서도, 그저 술이나 섹스, 야망 같은 것들이나 만지작거리면서 놀려고만 하고 있는 우리는,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대체 상상을 못해서, 그 제안을 거부하고 그저 달동네 지저분한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장난이나 하면서 놀고 싶어하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꼬마 아이와도 같다. 우리는 너무 시시한 것에 쉽게 만족해버린다.

이 천국 보상을 두고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이 뭔가 꼭 보상을 바라는 속물적 사고방식 같은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할 지 모르나, 괘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보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보상에는, 당신이 하는 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그런 종류의 보상이 있다. 이런 보상은 사실 엉뚱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돈이라는 보상은 사랑이라는 행위에 자연스럽게 따라나는 보상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남자가 여자의 돈을 보고 그녀와 결혼한다면 그를 엉뚱한 걸 바라는 속물이라고 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보상은 진실한 연인에게 주어지는 합당한 보상이다. 그러므로 연인이 결혼이라는 보상을 바란다고 해서 그가 속물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귀족자리 하나를 얻어볼까 노려서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장군이 있다면 그는 속물이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싸우는 장군은 속물이 아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마치 결혼이 연인에게 주어지는 바른 보상인 것처럼, 그 장군에게 있어서는, 전투에 대한 합당한 보상인 것이다. 즉, 진정한 보상이란 단순히 어떤 행동의 결과로 그것에 덧붙여지는 무엇이 아니라, 그 행동 자체의 절정이 곧 그 행동의 진정한 보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상의 세 번째 종류는 이것들보다 좀 더 복잡하다. 그리스 시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그리스어를 익혀둔 것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지, 속된 보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다는 것은, 단지 어느 정도 그리스 시를 즐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사람만이, 자신들의 체험을 통해 확실히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이다. 연인은 결혼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장군은 승리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지만, 지금 그리스어 문법을 배우고 있는 초등학생이 훗날 자신이 소포클레스(Sophocles: 그리스의 비극시인, 496?-406?B.C.)의 시를 즐길 수 있게 될 것 때문에 가슴이 뛰는 법은 없다. 그는 그저 학점을 따기 위해서, 혹은 혼나지 않기 위해, 아니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혹은 기껏해야 지금으로서는 배워두면 왜 좋은지 상상도 안되고 별 내키지도 않지만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문법 공부를 시작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세 번째 케이스의 보상은 엉뚱한 보상을 바라는 속물심리와 어떤 유사점이 있긴 있다. 즉 후에 얻게 될 보상(그리스 시 감상)은, 사실 그가 지금 하는 행동(그리스어 문법 공부)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따라서 합당한 보상이긴 하지만, 그는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그 보상을 얻게 되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이 보상을 조금씩 조금씩 이미 받고 있기는 하다. 지겹기 만한 공부시간에도 가끔 그리스 시의 참 맛이 살짝 느껴지기도 하고, 또 지겹기만 하던 그리스어 학습이 끝나고 즐거운 그리스 시 감상이 시작되는 시간이 딱 잘라서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그 보상을 그것 자체로서 얼마나 열망할 수 있게 되느냐 하는 것은, 그가 그 보상에 얼마만큼 가깝게 접근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그 보상을 갈망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이미 그 보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의 하늘나라 보상은 이 세 번째 종류의 보상과 많은 점에 있어 유사하다. 영원한 삶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사람들은 그 영생이라는 것이 결코 하나님이 쓰시는 어떤 뇌물이 아니라 지상에서 제자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바로 절정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러한 비전이 없는 사람은 이것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다. 깨닫기 위해서는, 그저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길 뿐, 다른 길은 없다. 그렇게 그저 순종하다보면 그 순종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보상의 맛을 조금 알게 되고 그러면 우리 속에는 최종적으로 완성된 보상을 갈망하는 내적인 힘이 점점 더 자라나게 된다. 그리고 그 보상에 대한 갈망이 자라나는 것만큼 우리 속에서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우리의 갈망이 어떤 보상이나 바라는 속물심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점점 사라지게 되고, 마침내 그런 사고가 얼마나 터무니없던 것인지를 깨달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 이런 깨달음이 하루아침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시가 문법을 대신하고, 복음이 율법을 대신하고, 단순한 복종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은, 마치 바닷물이 조금씩 불어나 마침내 정박해둔 배가 물에 뜨듯이 천천히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또 이 초등학생과 우리 사이에 중요한 유사점이 한가지 더 있다. 만일 그 초등학생이 아주 상상력이 풍부한 소년이라면, 그는 아마 십중팔구 선생님 말씀을 거역하면서 자기 또래 아이들이나 좋아할 만한 재미있는 영국 시들이나 공상소설류들만 읽으려 할 것이다. 그리스어 공부가 나중에 자기를 같은 종류의 재미 그것도 그보다 더 큰 즐거움으로 이끌어주리라 하는 생각은 아직 못하고서 말이다. 또 몰래 몰래 셜리(Shelley: 영국의 낭만파 서정시인, 1792-1822)나 스윈번(Swinburne: 영국의 비극시인, 1837-1909)을 읽느라고 정신없어서 그리스어 공부를 등한히 하기조차 할 지도 모른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훗날 그리스어가 진정으로 만족시켜줄 수 있는 갈망이 이미 그 소년 안에 존재하고 있는 데, 지금의 그는 그 갈망을 크세노폰(Xenophone: 그리스의 철학자 역사가 장군, 434?-355? B.C.)과 ? 로 시작하는 동사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대상을 향해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는 원래 하늘나라에서 살도록 그렇게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우리 안에는 우리의 진정한 고향인 그곳에 대한 갈망이 이미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의 갈망은 진정한 대상이 아닌 다소 엉뚱한 대상을 향하고 있고 또 그 엉뚱한 대상은 우리의 갈망의 진정한 대상과 심지어 라이벌 관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발견해낼 수 있는 유사점이다. 물론 나의 이 초등학생 비유가 잘 맞아 들어가지 않는 점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그리스어 공부 대신에 그 아이가 지금 읽고 있는 그 영국 시는 그리스어 공부를 통해 그 아이가 나중에 즐길 수 있게 될 그리스 시에 못지 않게 좋은 작품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스킬로스(Aeschylus: 로마의 비극시인, 525-456B.C.)를 탐구하는 대신 밀튼(Milton: 영국의 시인, 실락원(Paradise Lost)의 저자, 1608-74)을 택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아이더러 너는 지금 너의 갈망을 만족시켜줄 진정한 대상이 아닌 엉뚱한 대상을 잘못 알아보고 얼싸 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이것과 매우 다르다. 만일 영원하고 무한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운명이라면,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이 영원하고 무한한 행복 외에 우리의 갈망이 택하는 여하한의 모든 다른 행복들은 다 어느 정도는 우리를 현혹시키고 있는 것들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을 상징해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먼 본향을 향한 우리의 이 갈망,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 갈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다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지금 가히 점잖지 못한 말을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여러분 각자 안에 있는 숨겨져 있는, 그 위로 받을 길 없는 비밀스런 갈망을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비밀스런 갈망이 여러분에게 준 상처는 너무나 깊은 것이라서, 여러분들은 그 갈망에다가 무슨 '향수병(Nostalgia)'이니 '낭만적 생각(Romanticism)'이니 '철없는 꿈(Adolescence)'이니 하는 이름들을 붙임으로써 그것에 복수를 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달콤하게 우리 내면 깊은 곳을 뚫고 들어오는데, 누군가와 매우 친밀한 대화를 나눌 때, 이 갈망에 대한 이야기가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올 뻔한 순간, 우리는 스스로 어색해하고서는 자조의 웃음을 짓곤 한다. 숨기고 싶지만 숨길 수 없고, 말하고 싶지만 또 말할 수도 없는, 우리 안의 이 비밀스런 갈망. 우리가 이 비밀을 터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결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이요, 그렇다고 또 이 비밀을 숨기지도 못하는 까닭은, 그것은 우리의 경험 속에 끊임없이 은연중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인들은 아무리 안 그럴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들리면 어쩔 수 없이 티를 내게끔 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안의 이 갈망에 대해 어쩔 수 없이 티를 내게 된다. 이러한 갈망의 대상에 대해 우리는 흔히 그런걸 바로 미(美)라고 하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간단히 설명해 치워버리는 경향이 있다. 워즈워드(Wordsworth: 영국의 자연파 계관시인, 1770-1850)는 그것을 자신의 과거의 어떤 순간들과 동일시함으로써 간단히 매도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 모두는 다 속임수다. 만일 워즈워드가 자신의 과거의 그 순간들로 되돌아 가볼 수 있다해도 그는 거기서 (자신의 갈망의 대상인) 그것 자체를 발견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어린 시절 그 순간 자신에게 그것을 암시했던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뿐일 것이다. 사실 어른이 되어서 그가 기억한 것이라곤, 자신이 어린 시절 무언가를 기억했다는 사실뿐이었던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What he remembered would turn out to be itself a remembering: "사실 그는 '무언가'를 기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린 시절 '무언가를 기억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떤 책이나 음악 속에 미(美)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나 그 책이나 음악은 우리의 그런 믿음을 배신해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미는 "그것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을 거쳐서" 우리에게 오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은 무언가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다. 사실 이것들은 -- 그것이 미(美)이든 자신의 과거의 기억이든 --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무언가의 좋은 이미지에 불과한 것들이다. 우리가 무언가의 이미지에 불과한 것들을 그것 자체로 착각해버린다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말 못하는 우상이 되어 자신의 숭배자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그 무엇 그 자체가 아니요 단지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꽃의 향기요, 우리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음악의 여운이요, 우리가 아직 방문해보지 못한 나라로부터 들리는 소식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가 지금 당신에게 무슨 주문을 걸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어렸을 적 읽어보았던 동화 이야기를 한번 잘 생각해 보라. 주문은 마법을 거는 데에도 사용되지만 마법을 푸는 데에도 사용된다. 그리고 지금 당신과 나에게 필요한 것은, 거의 백년 가까이 우리를 묶어왔던 세속주의(죽음 이후 영원한 세계란 없고 오직 이 현세만이 전부라는 생각--역주)라고 하는 이 악한 마법으로부터 우리를 깨어줄 강력한 주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온 거의 대부분의 교육은 우리더러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이 끈질긴 목소리를 잠재워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또 거의 대부분의 현대 철학들도 인간의 낙원은 바로 이 현세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주는데 혈안이 되어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진보적 혹은 창조적 진화 철학들 자체가, 사실 자기들 본의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우리의 진정한 목적지는 여기 이곳 현세가 아닌 다른 데라는 진리를 드러내주고 있는 격이 되고 있다. 그들이 당신에게 이 곳 현세만이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라고 납득시키려 할 때, 그들이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한번 주의 깊게 들어 보라. 그들은 우선 이 곳 현세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하려 하는데, 이것은 지금 이 세상은 단지 우리의 타향일 뿐이라는 당신의 직관에다 대고 호소하고 있는 셈이다. 그 다음에 그들은, 그러나 이러한 복된 일은 지금은 아니고 꽤 먼 장래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또한, 우리의 본향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는, 당신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참된 지식에다 두고 호소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이미 익히 직관하고 있는 지식에다 호소를 하고 나서,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 그만 당신 속에서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깨어나게 되어 문제를 다 망쳐버리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가능한 모든 수사학을 다 동원하여 자기들의 말을 그럴듯하게 꾸민다. 설령 그들이 약속하는 모든 행복이 이 지상에서 인간들에게 다 실현된다 한들, 여전히 개개의 인간은 각자 죽음을 통해 그 행복을 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인류 최후의 세대도 마찬가지 일 것이고, 그러면 결국은 모든 것은 다 공허한 이야기, 아니 무슨 이야기라고 부를만한 것도 되지 못하는 그저 허무함으로 영원히 끝나버리고 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당신 머리 속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하려고, 모든 멋들어진 말은 있는 대로 다 갖다 붙이는 것이다. 버나드 쇼(Bernard Shaw: 아일랜드의 작가, 비평가, 1856-1950) 선생이 릴리쓰(Lilith)의 마지막 연설에서 들려준 모든 터무니없는 말들, 또 무슨 '창조적 생명력(elan vital)'이라는 것이 인간의 모든 장애물들, 아마 심지어 죽음까지도 정복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베르그송(Bergson: 프랑스의 철학자,1859-1941)의 얼토당토않은 주장 등은, 마치 이 지구 위의 사회적 혹은 생물학적 발전은 태양의 노쇠도 늦출 수 있고 열역학 제2법칙도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을 우리더러 믿으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그런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자연적 행복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어떤 갈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갈망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무슨 소리!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이 곧 빵이 있다는 걸 증명해주지는 못하는 것 아니요?" 그러나 나는 이런 반론은 논리에 있어 부실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이 빵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대서양 한가운데서 뗏목을 타고 표류하다가 결국 굶어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가 식사로 배를 채우는 종족 출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음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세상에 그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증명해준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낙원을 갈망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후에 낙원을 즐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고는 믿지 않지만(이렇기만 하다면 야 얼마나 좋을까마는), 낙원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즐기게 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는 된다라고 생각한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가 결국 그녀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대체 성(性)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에서 "사랑에 빠짐"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존재한다면, 그건 참 기괴한 일 아니겠는가.

자 여기, 자신이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디에 그것이 있는지 잘 몰라 그저 이리저리 헤매고만 있는 어떤 갈망이 있다. 그런데, 우리의 성서는 이 갈망의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물론 이런 설명은 하나의 상징이다. 하늘나라란, 당연지사, 우리의 경험 밖에 있는(우리가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고, 또 우리는 우리의 경험 이내에 있는(우리가 경험해 본) 것에 대해서만 알아듣게 묘사할 수 있다. 따라서, 하늘나라에 대해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그림은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갈망의 대상에 대해 우리가 성서의 도움 없이 제 혼자 스스로 만들어본 그림들도 마찬가지로 상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즉, 하늘나라가 실제로 성서가 그리듯이, 무슨 금은보화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이 아니듯이,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는 우리가 상상해보는 것처럼, 무슨 자연의 미(美)도 아니고 아름다운 한 곡의 음악도 아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성서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에게는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리보다 더 하나님과 가까웠던 분들이 기록해 놓은 것들이고, 게다가 수세기에 걸쳐 기독교인의 경험의 시험을 거쳐온 것들이다. 처음 나는 이 권위 있는 이미지들에게서 매력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아니, 처음에 그것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나의 갈망을 일깨우기는커녕 오히려 식혀버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당연히 그러하리라 예상했었어야 했던 일이었다. 만일 기독교가 우리의 먼 본향, 하늘나라에 대해 나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들이, 내가 내 기질 상으로 자연히 예상해왔던 이미지들과 별 다를 바 없다면, 기독교란 겨우 나 정도 수준밖에는 안 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만일 그 이상이라면, 나는 그것이 처음부터 "내 취향"에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으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겨우 셜리(Shelley)의 시 정도만 읽어본 아이에게는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시는 처음에는 당연히 재미없고 무미건조해 보일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객관적인 종교라면(즉, 만일 기독교가 인간이 자신의 주관적 취향대로 만들어낸 종교가 아니라면--역주), 우리는 기독교 안에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고 또 거부감 마저 일으키는 것이 있다해서 거기서 눈을 돌려버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고 또 알 필요가 있는 것들은, 다름아니라 기독교에게서 우리가 당혹감과 거부감을 느끼는 바로 그 부분들에 숨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 관해 성서가 하고 있는 약속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다섯 개의 항목으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2) 우리는 그분을 닮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 여기에 대해 성서는 엄청나게 화려한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있다 (4)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잘 먹고 잔치를 하고 유희를 얻을 것이다 (5) 우리는 우주 안에서 일종의 직위를 얻게 될 것이다 -- 성서에는, 고을을 다스린다, 천사를 심판한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된다 하는 말 등이 있다. 여기서 나올 만한 질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니, 첫 번째 축복만으로 충분하지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됐지, 또 무엇이 거기에 더 덧붙여질 필요가 있단 말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그렇긴 하다. 옛날에 어떤 작가가 말했듯이, 하나님을 모시고 또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있다해도,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모신 사람보다 더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건 사실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상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또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언뜻 봐서는 잘 모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지금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나머지 다른 약속들 못지 않게 역시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 속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 같은 어떤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은근슬쩍 떠오르기 때문이다. 또 이는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배제시킨 체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에만 우리의 생각이 집중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실제, 우리는 기독교인들 중 오로지 이 첫 번째 약속에만 관심을 두는 이들은 항상 그 약속에 대해, 온통 결혼이나 성애(性愛)같은 매우 현세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나는 지금 그러한 이미지들이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러한 이미지가 주는 체험에 내가 지금보다 더 깊이 들어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 역시 하나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그것이 나타내 주고 있는 실재와 같지만 또 다른 점에서는 다르다. 그래서 이 상징이 나머지 약속들의 다른 상징들에 의해 보완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양한 약속들이 제시되어 있다고 해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얻게 되는 것 말고 무슨 다른 지복(至福)이 또 있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여러 개의 각양 각색 이미지들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인격체 그 이상인 분이기에, 장차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누리게 될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가 너무 이 곳 현세에서 경험해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만을 가지고 연상해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란 (하나님과의 사랑에 비해선,) 궁색하고 피곤하고 무미건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그 이미지를 보완해주고 또 바로 잡아줄 여러 개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필요한 것이다.

자, 이제 영광이라는 개념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신약 성서와 초기 기독교 저술들에 이 영광이라는 개념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명명백백하다. 구원이라는 말은 매우 자주 종려나무 가지, 면류관, 흰 옷, 보좌 혹은 빛나는 태양이나 별 같은 것들과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다. 처음에 나는 이런 것들에 전혀 매력을 못 느꼈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내가 전형적인 현대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겠다. 영광이라는 말을 접하면 나에게는 두 가지 느낌이 드는데, 하나는 악하다는 느낌이고 다른 하나는 우스꽝스럽다는 느낌이다. 영광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명성' 아니면 '빛나는 물체'가 생각난다. 명성이라는 뜻으로 봐서는, 영광 곧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려진다는 말이고 따라서 명성을 갈망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엔 경쟁심을 말하는 것인데, 하지만 경쟁심이란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옥에 속한 것이 아니었던가? 또 빛나는 물체라는 뜻에서 보면, 대체 자기가 일종의 살아있는 전구(電球) 같은 것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밀튼(Milton) 이나 존슨(Samuel Johnson: 영국의 문학가 사전편찬가, 1709-84)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이탈리아의 철학자 가톨릭 신학자, 1225-74) 같이, 서로 아주 다른 기독교인들이 이 하늘의 영광에 대해 말할 때는 모두, 전혀 스스럼없이 그것을 명성이나 명예라는 의미로 사용했었다는 사실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명성이란, 같은 인간들끼리 부여해주는 그런 명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명성, 하나님의 인정, 혹은 (이런 말까지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그 진가를 인정해주시는 것"이라는 의미의 명성을 말함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결국 나는 그들의 관점이 성서적이란 것을 깨달았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이 애컬레이드(accolade: (왕이 칼로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하는) 나이트작 수여(식);영예수여--역주)는 결코 그 예화(마25:14-30)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 깨달음이 오자, 그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 중 상당 부분이 마치 카드로 만든 집처럼 허물어져버렸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의 뜻이 갑자기 깨달아졌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서 가장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린아이는 -- 잘난척하는 아이 말고 착한 아이의 경우 -- 칭찬을 들으면 너무나 좋아하고 또 그것도 아무런 꾸밈없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나 말 같은 짐승들도 그러하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겸손이라고 잘못 착각해온 것 때문에, 사실 모든 즐거움들 중 가장 겸손한 즐거움이요, 가장 동심 같은 즐거움이요, 가장 피조물다운 즐거움인, 이 작은 자가 되는 특별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해왔던 것이다. 작은 자된 즐거움, 이것은 사람 앞에서 짐승이 느끼는 즐거움이요, 아버지 앞에서 자식이 느끼는 즐거움이요, 스승 앞에서 제자가 느끼는 즐거움이요, 창조자 앞에서 피조물이 느끼는 즐거움이다. 이처럼 지극히 순수한 갈망이 얼마나 끔찍한 인간적 야심으로 쉽게 변질되어 버리는지, 또 나도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마땅히 기쁘게 해드려야 할 분에게서 칭찬을 받았을 때, 그 합법적인 즐거움이 얼마나 빨리 자기도취라는 치명적 독으로 변질되어 버리는지, 내가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또, 내가 사랑하고 어려워해야 함이 마땅한 분을 내가 기쁘게 해드렸을 때, 그 어떤 변질이 일어나기 전, -- 비록 대단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긴 하지만 -- 그야말로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순수한 만족을 내가 느끼는 순간도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구속받은 영혼이, 자신이, 창조 받은 목적대로 자신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는 사실을, 하늘나라에서 알게 되었을 때, 이 믿기지 않고 상상도 안 되는 사실 앞에서, 그 영혼이 무엇을 느끼게 되리라는 것에 대해 한번 상상해볼 수 있다. 그 순간 그 영혼에게는 무슨 허영심 같은 것이 발붙일 자리란 도무지 없을 것이다. 그 엄청난 일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다 자기 덕이라는 파렴치한 환상 따위는 발붙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 자신이 그렇게 자신인 것에 그저 한없이 천진난만한 기쁨만을 느끼는 그 영혼에게 무슨 자기자랑 같은 것은 흔적조차도 없으리라. 예전의 모든 열등감이 영원히 치유되는 그 순간에는 교만심도 역시 영원히 사라져버리게 된다. 완전한 겸손은 어줍잖은 겸손 따위를 가장하지 않는다(Perfect humility dispenses with modesty). 자신이 만드신 작품에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대야, 그 작품도 마땅히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인님께서 해주시는 칭찬에 어줍잖은 겸손 같은 건 떨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하늘나라를, 하나님께서 잘했다며 우리 등을 다독거려주시는 곳으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못마땅해하는 마음 이면에는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오해가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과의 대면,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무한한 기쁨 아니면 무한한 공포,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이 하나님께서 종국에 우리 각자 각자를 보시며 이것 아니면 저것, 즉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을 주시거나, 아니면, 우리로 영원히 치유될 수 없고 숨길 수 없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요전 날 어떤 잡지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다. 이건 정말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따위의 문제와는 도무지 비교도 되지 않을 만치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분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정도만큼만 중요할 뿐이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분 앞에 시험대에 서게 될 것이다. 영광을 얻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 우리 중 어떤 이들, 진정 그러기로 선택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고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이라는 이 약속은 그야말로 실로 믿어지지 않는 약속,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만 가능해진 약속이다.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것,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이유가 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는 것, 단지 불쌍히 여김을 받는 그런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마치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기뻐하듯이,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기뻐하듯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 이것은 실로 인간의 생각이 감히 감당해낼 수 없는 무게의 영광이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이다.

자, 영광이 이런 것이라면, 이제 무엇인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만일 내가 영광에 대한, 성서의 권위 있는 이미지를 거부하고, 처음에 나에게 있어 하늘나라를 가리켜주는 유일한 지시자였던, 내 안의 그 막연한 갈망에만 고집스럽게 집착했더라면, 나는 아마 내 갈망이 기독교의 약속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내게 당혹감과 거부감마저 주는 부분을 따라가 보고 나서 뒤돌아보니, 이제 나는, 너무나 놀랍게도, 그것들이 얼마나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발견하게된 것이다. 즉, 기독교가 내게 소망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영광이, 알고 보니, 내가 원래 그 전부터 갈망해 왔던 바로 그것이었고, 또 그 영광은 내가 내 갈망에 대해 미처 모르고 있던 점을 나로 알게 해주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잠시 접어두자,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아까 우리의 영적인 그리움에 대해 묘사해보았을 때, 나는 그것의 가장 흥미 있는 특징들 중 하나를 빠뜨리고 말했었다. 그것은, 우리가 그런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때는 바로, 어떤 비전의 순간이 사그라지는 때랄지, 음악이 끝나는 때랄지, 혹은 황홀했던 자연풍경이 빛을 잃어 가는 때 같은, 그런 시간들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갖는 느낌을 키츠(Keats: 영국의 시인, 1759-1821)는 "평소 자기로의 복귀 (the journey homeward to habitual self)"라는 말로 잘 표현해 놓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당신도 알 것이다. 얼마간 우리는 우리가 그 세계에 속해있다는 환상에 젖어 들어가곤 한다. 그러나 금세 우리는 거기서 깨어나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단지 구경꾼에 불과했던 것이다. 미(美)의 여신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우리보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우리를 쳐다 보려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세계는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고 환영해주지 않았고 그 무도회에 우리를 껴주지 않았다.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나든 아니면 어떻게든 남아있든, "우리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과학자는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들 중 대부분은 생물체가 아니므로,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사실이 못된다고 말이다. 물론 그렇긴 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어떤 물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물체들을 잠시 자신의 메신저로 삼아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두고서 하는 말이다.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 달콤함과 함께 쓰디쓴 마음을 들게끔 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 메시지란 것이 우리보고 들으라고 보내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는 다만 어쩌다 우연히 그것을 엿듣게 된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우리가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쓴 마음이란, 어떤 분개감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마음의 고통을 이름이다. 우리는, 우리를 주목해달라는 요구까지는 감히 할 생각을 못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그리움에 수척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우주에서 우리는 이방인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자신을 알아봐 주었으면 하고, 어떤 반응을 있기를 기대하고, 그리고 우리와 실재 사이에 벌어져 있는 이 간격에 다리가 놓여지기를 바라는 이 갈망은, 우리 모두의 마음 속 위로 받을 길 없는 비밀로 다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서가 약속해주고 있는 바로서의 영광이야말로 우리의 마음 속 이 깊은 갈망에 너무도 잘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시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 반응, 인정, 그리고 우리가 사물의 심장 속으로 환영받아 들어가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가 평생 두드려왔던 문이 마침내 열리는 것이다.

영광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아봐 주시는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다소 조야해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성서의 언어이기도 하다. 성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기를,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알아주실 것이다(고전 8:3)라고 했다. 이는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이상한 약속이다. 아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언제나 알고 계시는 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 이상한 약속은 신약성서의 또 다른 구절에서, 이번에는 우리를 오싹하게 만드는 음향으로 반복되어 울리고 있다. 그 구절은 경고하기를, 하나님과의 대면에서, 우리 중 어떤 이들은 그분으로부터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나를 떠나라"고 하는 끔찍한 말을 듣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견디기 어려운 말씀일뿐더러, 머리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쫓겨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우리가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밖으로' 쫓겨나가, 거절당하고, 추방되고, 소외되고, 그리고는 마침내 무시되고 마는, 이 참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경에, 우리가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초대받고, 환영받고, 영접 받고, 인정받게되는 가능성 또한 열려 있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 매일 이 두 가지 믿어지지 않는 가능성 사이로 난 아슬아슬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일생동안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는 이 노스탤지어(nostalgia), 즉 우주의 무언가로부터 자신이 떨어져 나왔다고 느끼고 그것과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이 갈망, 늘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어떤 곳에 언젠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원하는, 우리 마음 속 깊은 이 갈망은, 어떤 신경증적인 몽상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처해있는 상황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지표라는 것이다. 이제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부름을 마침내 받게 될 때, 우리의 모든 공로를 초월하는 이 과분한 영광과 영예는 동시에 우리 마음 속 이 오래된 아픔에 대한 치유도 될 것이다.

자, 이제 영광의 두 번째 의미, 즉 밝음, 광채, 광휘로서의 영광에 대해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성서는 우리가 해처럼 빛날 것이고, 새벽 별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나는 이제 이런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새벽 별을 주셨다. 날씨가 좋은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나가보면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얼마든지 보고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더 이상 또 뭘 원하느냐고 아마 당신은 물을지 모르겠다. 아, 그러나 사실 당신과 나는 이것 이상의 훨씬 더한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미학서적들은 우리에게 거의 말해주고 있는 바가 없지만, 시인들과 신화들은 여기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단지 '보기'만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한 축복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단순히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 이상의 것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보는 그 아름다움과 자신이 하나가 되고, 그 아름다움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고, 그 아름다움을 자신 속으로 받아들이고, 그 아름다움 속에 온통 잠기고, 자신이 그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하늘과 땅과 강 바다 호수를 온통 무슨 신들, 여신들, 님프(nymph), 꼬마 요정 같은 것들로 채워놓은 이유이다. 즉, 인간들은 자신들의 갈망을 밖으로 투사하여, 자연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어떤 아름다움, 은혜, 힘 등을 그 자신 스스로 가지고 있는 존재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또 이것이 바로 시인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스러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인들은 마치 서풍이 진짜로 인간의 영혼 속에 불어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또 그들은 "살랑거리는 소리에서 태어난 아름다움"이 마치 인간의 얼굴 속으로 진짜 들어올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아직까지는 사실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실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한 성서의 이미지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우리에게 새벽 별을 '주실'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태양의 광휘를 '입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고대의 신화들과 현대의 시들이 둘 다, 비록 역사로서는 거짓된 것들이지만, 예언으로서는 진실에 무척 가까이 접근해 있는 것들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우리는 그 세계의 밖에, 그 문 밖에 서있다. 아침의 신선함과 청명함을 우리가 알아볼 수는 있지만, 그 아침의 신선함과 청명함이 우리를 신선하고 청명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찬란함을 우리가 볼 수는 있어도, 그 찬란함과 어우러져 우리가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언젠가는 이러한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언젠가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무생물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기계적으로 온전히 순종하듯이, 그렇게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온전히 순종하게 되는 날, 우리는 자연의 영광, 아니 그 보다 훨씬 더 큰 영광, 자연을 통해서는 우리가 단지 그 초벌 스케치만을 볼 수 있었던 그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다. 자연은 이렇게 우리가 장차 얻게 될 그 영광의 초벌 스케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성서의 약속은, 우리가 자연 속으로 흡수될 것이라는 이교적 공상과는 분명히 다르다. 오히려 자연이 죽어 사라질 운명이다. 우리 인간이 자연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모든 태양과 성운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 버린 후에도, 우리들 각자는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자연은 단지 이미지요 상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우리더러 이용하라고 초대하고 있는 상징이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자연을 넘어서서, 그리고는 마침내 자연이 잘 반영해주고 있는 그 찬란한 영광 속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 자연을 넘어선 그 곳에서, 우리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거듭나면, 그 사람 속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양식을 얻으며 살게 되지만, 그러나 그의 정신(mind)과 더욱이 그의 몸은, 현재로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수천 번 걸러진 상태로서만 받고 있을 뿐이다. 즉, 그 생명은, 우리의 선조들, 우리가 먹는 음식들, 그 음식들의 성분요소 등을 통해 수없이 걸러진 상태로 우리에게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쾌락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니라, 세상들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그 창조적 환희가 물질 안에 심어놓은 에너지들을 인간의 육체가 현재 아주 어렴풋하고 희미하게나마 맛보게 되는 것을 두고 말함이다. 이렇게 수없이 걸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도 쾌락은 우리가 다 맛보기에 벅찬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낮은 곳에서 맛보는 물맛에도 우리가 이렇게 도취되고 있다면, 하물며 그 수원지에서 맛보는 물맛이야말로 과연 어떠하겠는가? 나는 바로 이것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라고 믿고 있다. 우리의 영과 정신과 몸, 전인이 기쁨의 수원지에서 기쁨을 마시게 될 것이다. 성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했듯이, 구원받은 영혼의 환희는 영화롭게된 그의 육체 속으로도 '흘러 들어가게'될 것이다. 지금은 우리의 입맛이 버려져 있고 한정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 'torrens voluptatis'(라틴어로서, "폭포수 같은 즐거움"이란 뜻--역주)에 대해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지나치게 심각하게 상상해보려고 하는 것은 해롭다. 그러나 이보다 더 해롭고 또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의 몸은 아니고) 우리의 영혼만이 구원을 얻는다든지, 아니면 부활한 몸은 오감으로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마땅히 근절되어야 한다. 육체 역시 주를 위해 지음 받은 것이다. 그들의 이런 음침한 공상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면류관 전에는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내일은 세상에서의 또 한 주간이 시작된다. 차갑게 닫혀있던 세계의 벽에 한 틈이 벌어졌고, 우리의 선장 되신 주님은 그 안에서 우리더러 따라들어 오라고 초대하고 계신다.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핵심은 물론 그 분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말해온 이 모든 추리적 사색들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대체 무슨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겠다. 나는 최소한 한가지 정도의 쓸모는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장차 받게 될 영광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이 장차 받게 될 영광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리 자주 혹은 아무리 깊이 생각한다해도, 그것이 결코 지나친 일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의 영광의 무게, 그 짐, 그 하중을 우리 등에 짊어져야 한다. 그 짐은 너무나 무거워 오직 겸손만이 짊어질 수 있으며, 교만한 등은 부러지고 말 것이다. 삶은 진지한 것이다. 우리는, 장차 신과 여신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재미없고 또 지루했던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만약 우리가 지금 그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당장 이라도 엎드려 경배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들게끔 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지금은 우리가 악몽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그런 끔찍하게 부패해진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루하루, 우리 모두는 서로 서로에게 이 두 가지 방향 중 어느 한 방향으로 가도록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서로를 대하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하고, 함께 놀고, 정치를 하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이 같은 엄청난 가능성을 기억하며 경외감과 신중함을 가짐이 마땅하다. '평범한' 사람이란 없다. 당신이 지금껏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저 죽으면 끝날(mortal)'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나라들, 문화들, 예술들, 문명들 -- 이런 것들은 모두 다 '그저 사라지고 말(mortal)' 것들이고, 그것들의 생명이란 우리 인간 개개인의 생명에 비하면 고작 모기만도 못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농담을 주고받고, 함께 일하고, 결혼하고, 무시하고, 이용해먹었던 인간들은 불멸의 존재들이다. 장차 불멸의 혐오(immortal horrors)가 되거나 아니면 불멸의 광채(immortal splendors)가 될 존재들인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언제나 항상 심각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놀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유희는 서로를 평시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런 종류의 유희 --그리고 사실 이런 종류의 유희가 가장 즐거운 것이기도 하다 --이어야 한다. 경박함이나, 거만함, 무례함 같은 것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 역시, 죄인은 사랑할지라도 그 죄에 대해선 깊이 염려하는, 참되고 대가를 치르는 사랑이어야 한다. 마치 경박함이 진정한 유희의 모조품에 불과한 것처럼, 단순한 관용이나 그저 내버려두는 것 등은 진정한 사랑의 모조품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성찬의 떡과 포도주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웃이다. 그리고 그가 만일 기독교인이라면, 그는 거의 성찬의 떡과 포도주만큼이나 거룩한 존재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영광을 주시는 분이시자 동시에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며, 영광 그 자체이신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찬에서처럼, 그 사람 속에 참으로 감추어져(vere latitat)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분류
트랙백 주고받기

마지막 편집일: 2002-12-10 12:51 pm (변경사항 [d])
2762 hits | 변경내역 보기 [h] | 이 페이지를 수정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