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한 칸에는 당신의 생각, 그 옆 칸에는 하나님의 생각?

사실, 이 트윗을 보고 떠올렸던 것은 영화 아마데우스였다.

영화 초반 살리에리는 기도하고 악상이 떠오르면 신에게 감사해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사실 이런식의 행동은 현재 한국의 많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에게도 보이는 현상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하면서.

하지만 이런 심리상태는 그냥 간단히 말해서 영유아기의 ‘상상속의 친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많은 종교적인 체험은 이것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상상속의 친구’는 어렸을 적의 해프닝으로 끝나는 경우 뿐 아니라 어떤 이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Megan Lincoln이라는 사람은 난독증이 있어서 학교 수업에서 낭독시간이 있을 때 마다 화장실로 도망을 갔었다. 선생이 이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난독증은 처칠, 탐 크루즈, 셰어 등과 같은 사람도 앓고 있는 병으로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그날 이후, 그녀는 셰어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때처럼 화장실로 도망갔던 그녀에게 셰어가 자신 감을 가지고 교실로 돌아가도록 말을 걸어왔고, 그 덕분에 용기를 내어서 다시 교실로 돌아갔던 경험을 한다.

자신이 어떻게 난독증을 극복해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대답하기가 그래서 곤란했었다고 한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셰어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고는 공개적으로 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LINCOLN: I remember her telling me that it was smelly in the bathroom. Why are you sitting in a smelly bathroom? She’s like, you’re better than this. Go back and take that test. Confront the test. It’ll be much better than sitting here in this smelly bathroom. And I would take my deep breath, and I would walk out, and I would smile, you know, and I’d probably curse her out a little bit, and I’d go back into that classroom and take that test. I never felt dumb after that.

Secret Friends: Tapping Into The Power Of Imagination

인류학자인 Tanya Luhrmann은 마법을 쓴다는 그룹을 인류학적인 접근법으로 회의적인 편견을 가지지 않고 긍정하면서 관찰을 하며 그 모임에 참가하면서 구체적인 이야기와 이미지를 통해 ‘상상의 존재’ 를 보다 현실적인 존재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자신의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단체에서 말하는 ‘그 이면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LUHRMANN: And what this man did during the weekend was to, in effect, tell story after story about these pictures in a way that he wanted us to experience these pictures as if we were living in a dream, as if we were going down a river or on a boat together. And we would get out of the boat. And we would look up, and we would see a temple. And there was the priestess. And this is what the priestess looked like. And he wanted us to experience those stories as if they were happening.

LUHRMANN: And my dreams were becoming vivid and dripping with symbolism. I remember having this dream at one point in which what I knew was my soul was swimming across a river in a thunderstorm to scramble up the other side on this bank of mud. And I kept falling back, and then I’d go forward. And I remember waking up and thinking, oh, my goodness. I’m having different kinds of dreams. And that was a dream about my soul.

Secret Friends: Tapping Into The Power Of Imagination

그녀는 이때의 경험을 살려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비슷한 방식이 작동함을 알게 된다.

LUHRMANN: They’re using very similar kinds of what I would call spiritual practices. They were inviting people to use external symbols, props, and internal images, stories, in order to allow the person to enter a world which is not the world of the day-to-day and to come to experience that world as if it is present, as if it’s real.

Secret Friends: Tapping Into The Power Of Imagination

그래서 그녀는 실험을 해본다. 신앙을 가진 사람을 무작위로 뽑아 한 그룹에게는 기도를 할 때 시편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목자’ 처럼 구체적인 상호작용이 있는 것 처럼 상상하도록 한 것이다.

그랬더니 신이 자신의 곁에 있다고 생생하게 느꼈고 목소리를 듣기까지 한 사람이 나왔다. 마치 Megan Lincoln이 셰어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처럼.

LUHRMANN: So I found that people in the prayer group were more likely to say that their mental images were vivid. They were more likely to say that God felt more like a person to them, that they were more likely to have gotten angry at God or become playful with God. They were also more likely to say they’d had a moment, when they had heard God speak in a way they could hear with their ears, or they had seen something that wasn’t materially real in the world, or they’d had some vivid sense of God’s presence.

Secret Friends: Tapping Into The Power Of Imagination

그래서 대부분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령충만한 삶”이라는 것은 영유아기의 “상상속의 친구”와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인간의 성격을 이용하여 어떤 마술사는 청중에게 종교적인 체험을 경험하게 하는 것도 성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얘기할 때 생생한 경험보다 성경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도 바로 함정이 있다. 성경을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유혹에 인간은 너무나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얄궂게도 성경의 무오함을 주장하면 할수록, 오류에 빠지기 쉬운 우리 자신의 욕망을 최고의 권위로 삼을 위험이 커진다고 믿는다. 언어는 복잡한 인간의 재능이다.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것을 듣는 일은 너무나 쉽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것을 성경이 이야기 할 때, 가장 진지하게 성경을 취하려는 유혹이 있다. 만일 성경이 무오하다면 그것이 우리의 욕망도 무오하게 만들까?

현대 과학과 기독교의 논쟁

그래서 성경전체를 통해 확립한 ‘교리’가 있는 것인데, 한국 교회에서는 이 ‘교리’를 통해서 성경을 보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 없고, 교리 자체를 알려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목사가 교리를 무시하고 성경을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 지경이다.

그래서 계속 이런 ‘상상속의 친구’ 수준의 ‘신앙’이 재생산되고..

P.S. 사실, 노트 한쪽 면에는 이런 생각, 다른 면에는 저런 생각을 적는 방법을 처음 접한 것은 오타킹으로 유명한 오카다 도시오의 Smart Note 였다.

See also 스마트 노트술

진리를 외면하는 것은 어느쪽인가.

‘핀치의 부리’저자 후기를 보면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개신교 창조론자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해주면 매우 흥미롭게 듣고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네요’라고 반응하다가 그게 바로 ‘진화론’이죠 하면 데꿀멍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보수 개신교의 창조론과 동성애에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이렇다. 진화론이 뭔지, 동성애가 뭔지 제대로 모른다.

동성애를 왜 반대하냐? → 성경에 죄라고 써있다. → 뭐라고 써있는데? 성서에서 말하는 것이 현대적 의미의 성적지향인지?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신학적 배경, 과학적 배경을 말하면 역시 데꿀멍하다가 ‘그래도 죄악이야!’라고 말하면서 사라짐. 심지어 목사도 그럼. 과학적인 부분에서 무지한거야 이해가 가지만 신학적인 부분에서도 이러면.. 목사 어떻게 된거지?

지인소식에 의하면 얼마전 뉴스에 났던 감리교의 ‘동성애목사퇴출’ 을 결정하는 회의에서도 거기 모인 사람들은 ‘성소수자’가 뭔지 모르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진리를 외면하는 것은 어느쪽인가.

See also

자동차 엔진이 고장나서 고쳐야 할 때 우리는 이를 위해 성경을 보지 않는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나서 고쳐야 할 때 우리는 이를 위해 성경을 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태양계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고 각 행성의 특징이 뭔지 알고 싶을 때 성경을 보지 않는다. 한 때 천문도 신학의 영역으로 성경 구절에 따라 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분석과 연구가 축적된 적이 있더라도 말이다.

동성애에 대해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성경을 토대로 이에 대한 분석?글을 볼 때마다 답답하다. 게다가 성적 지향이라는 개념을 그냥 개인의 취향수준으로 생각하고 논의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좀 어이가 없다. 그냥 게으르고 공부하기 싫다는 소리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은, 창조주가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는지 성경의 저자가 깨닫고,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창조주의 놀라운 계획을 체험한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 모든 진리, 또는 사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니다.

See also 동성애 : TheLibraryOfBabel

창조과학, 동성애, 여성혐오 그리고 성서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창조과학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얼마나 말이 안 되는가? 이전에, 성서비평 신학만 공부해도 창조과학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 수 있고,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성서비평학을 배우기 때문이다.그래서 교회 분위기상 창조과학에 대해 대놓고 뭐라고 하지 않아도 목사들도 대부분 창조과학에 대해서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기존 통념에서 비롯한 거부감 때문에 반대를 하는 사람도 많았고, 차별금지법 제정 때 보인 집단적인 움직임도 있어서 크게 우려해왔다. 그래서 바벨위키에 동성애에 대해 정리해 놓고 SNS 상에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 문제는 뿌리가 같은 문제였다.

웹진 <제3시대> :: [시평] ‘창조과학’의 ‘창조론’에는 없는 여성과 성 소수자들의 권리 (김나미)

?‘창조과학’의 문제는 문자주의적 성서해석과 그 해석에 근거한 신학에서 보여지는 집요한 반지성주의와 여성차별 및 성소수자 차별의 요소들이다.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주의 기독교의 초석인 성서무오설과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에 바탕을 둔 신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본주의’1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성서의 무오를 믿는 일반적인 복음주의적 신앙”을 옹호하는 신학은 19세기 중반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2 그런 신학은 19세기 성서의 권위를 둘러싼 논쟁 중에 만들어 졌고, 천년왕국설 운동과 함께 근본주의 기독교의 특징이 되었다. 근본주의 기독교의 토대가 되는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고, 그런 해석은 일관성 없이 선택적으로 적용되어져 왔다. 이런 성서무오설은 19세기 말부터 미국의 백인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으로 전파되었고, 이들에 의해 문자주의적 해석만이 성서를 올바르게 읽는 방법이라는 통념이 한국교회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대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할 주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무엇을 왜, 어떤 교육철학과 목적으로, 그리고 어떻게 가르치는냐 일 것이다. 감동을 주는 소설이나 은유 가득한 시를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듯이, 다양한 창조설화들도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창조설화를 다양한 이론과 방법을 통해 해석해 내고 설화의 의미들이 사람들의 삶에 미쳐온 영향 (긍정적, 부정적인 것 모두 포함해서)들에 대해 토론을 하고,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 현재의 내 삶과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연관지어 생각하면서 더 많은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수업이라면 해 볼 만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수업의 목적이 한 종교의 한가지 교리만을 ‘진리’로 가르치려는 ‘교화’ (indoctrination) 또는 ‘주입’이라면 교육의 장에 들어설 수 없고 그래서도 않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대학을 비롯한 학교들은 ‘교화 공장’ (indoctrination mill)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과학은 역시 백해무익이다. ?호모포비아, 여성혐오로 이어진다.

See also